옛날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선택되고 (B.C.2100년경), 그 후 모세시대에 시내 산 언약(출19:5-6)을 채결한 선민으로 공식 태동한 이래(B.C.1445) 이스라엘 공동체는 신정 체제를 유지하여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시대(B.C.1405)를 거쳐 사사시대 마지막 사사로서 사무엘(B.C.1050)까지 신정 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백성들의 왕정 요구를 수락하게 되므로 이스라엘 왕정 체제가 시작되게 되었다.
삼상8:1-9절에서 사무엘의 노쇠와 그의 아들들의 타락으로 결국 백성들이 왕정을 요구하게 된 배경이 소개되고 있다.
왕정체제의 단점에 대한 지적(10-18), 모세를 통한 왕정시대 언급(신17:14-20)
하나님께서 왕정 요구를 책망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선민으로서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자신들의 신앙 부족에 있다는 근본적 이유는 깨닫지 않은채 다만 자기들의 정치 체제가 이방인들의 왕정 체제에 비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는 불신앙적인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어리석음에서 왕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원인을 자신의 신앙에서 찾지 않고 기타 부수적인 원인에서만 찾을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 그 염려는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요구한 왕정 체제를 구축했으나 계속된 타락의 결과 거듭 쇠퇴하여 결국 왕국 분열과 남북 왕국 각각의 몰락 때까지 전반적인 악순환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과거 이스라엘이 범한 실수를 대하면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동일한 구속사의 선상에 서 있는 우리들은 다시금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의 궁극적 본질을 깨달아 그것이 다른 부수적 해결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럭한 사람의 아들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삼상9:1,2). 하나님께서 왕으로 택정하신 사울이 사무엘을 만날 수 있도록 아비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나서게 섭리하시고(9:3,4). 잃어버린 나귀를 찾는 심정에서 사무엘 선지자를 만난 사울이 하나님의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 받아 백성들의 존경받는 자가 될 것임을 전해 받았을 때 사울이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지파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한 자신에게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시나이까?((9:21).
그때 사무엘이 사울을 유력한자 30여 명이 모인 자리의 수석에 앉히므로 그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왕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삼상9:22절), 그런 후 사울을 산당의 지붕으로 불러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구체적으로 전달한다(25-27절)
사울에 속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한 지파가 멸종당할 뻔 했던 지파(삿21:15)이다. 즉 기드온 사사 시대 말기로 추정되는 때에 에브라임 산지에 거류하는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데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 지내매(삿19:1,2) 레위가 가서 첩을 데리고 오던 도중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유숙하려고 그리로 들어갔다가 (삿19:14) 그 성읍의 불량배들에 의해 죽게 되었고, 죽은 시체를 나귀에 실고 집에 돌아가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삿19:29) 온 이스라엘이 전쟁을 준비하여 베냐민 지파와 싸움에서 베냐민 지파 600명의 장정 외에는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삿20:1-48).
사울의 아비 기스(삼상9:1 유력한 사람) 역시 그러한 와중에서 살아남아 가문을 보존한 자였을 것이다.
사사 겸 제사장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부음이 되기 전 사환으로 앞서가게 한 후(삼상9:27), 사무엘이 비밀리에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다(10:1) 이는 공식적인 절차 밟기 전에, 왕으로 택정 사실 알려지면, 반발 우려, 그에게 먼저 기름 부음은 신정적 왕정정치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왕정이 과거 신정 체제로부터의 혁명이나 반역이 아니라 최후의 신정 체제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최초의 왕인 사울에게 기름 부음을 함으로써, 즉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그 옛날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언약 국가로 수립한 이래 계속되어 온 신정 체제에서 자연스럽게 이양되어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비록 정치 체제가 형식적으로는 신정에서 왕정이 되었으나 그 왕정 체제도 향후 계속하여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실천하기 위한 체제로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 왕정 체제는 신정적 일관성을 계승한 신정적(신의 대변자로서) 왕정 체제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 이면에서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이스라엘이 과거로부터 연속된 신정 왕국체제를 건립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선민 언약 국가로서의 역사를 계속 유지 하였다는 사실이다.
1-16절은 일단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단독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모습을 , 후반부 17-27절은 전 민족의 대표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함으로써 사울이 재차 하나님이 택하신 왕으로 피택되는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본장은 이미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아직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던 사울이 하나님이 신의 감동으로 떨쳐 일어나 전 민족을 영도하여 혁혁한 군사적 공로를 세우고 비로소 전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과정을 보도하고 있다. 그 세부 내용은 암몬족의 침입으로 인한 야베스 거민들의 위기(1-4절), 사울의 민족 영도와 암몬족 격파(5-11절), 사무엘을 중심으로한 전 민족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크게 기뻐하니라(12-15절).
본장에 나타난 등극 이전의 사울의 신앙적 모습(9:21을 포함)과 등극 이후 내내 보여 준 사울의 비 신앙적 모습을 대조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교훈을 발견한다. 그것은 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 즉 성령에 감동 받아 일할 때에만 참 승리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등극 이전의 초라했던 사울이 성령에 감동되었을 때에는 완전한 승리와 아울러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나, 오히려 등극 이후에는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내내 개인과 국가적으로 쇠퇴와 분열만 초래케 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삿21장에서 베냐민 지파와 야베스 거민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베냐민 지파가 궐이 나게 된 것이 이스라엘 총회(삿19-20장)의 과도한 행위로 말미암은 실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고 여호와께 회개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과정(1-7절)과 여호와 총회에 참석치 않은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에 대한 심판(8-12절) 및 베냐민 지파의 회복(13-25절)에 대해 기록.
인간은 인간만의 힘으로는 결코 개인이나 공동체 전체가 결코 완전하고 영구하고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 동기가 그랬고 그 과정에 그러했으며 또 그 전쟁 이후의 수습 결과가 이를 반증해 준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에 대한 성급한 전멸 계획을 곧 후회하고 이제는 그들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또 다시, 비록 형식적이지만, 납치라는 모순된 행위를 저질러야 했다(8-12절)
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 600명에게 아내를 구해주기 위해서 고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총회에 참석치 않은 자들을 처벌하기로 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참석 하지 않았는지를 조사 중 요단강 동편의 야베스 길르앗에서 한 사람도 참석치 않았음을 발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을 죽이기로 하고, 그들의 여자들을 취하여 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들에게 아내로 주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죄의 연속성이다.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으로 약3,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그곳 사람들은 요단 동쪽에 위치한 므낫세 반지파의 일부였다. 그들이 베냐민 지파를 공격하기로 한 총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은 것은 아마 그들이 라헬의 자손으로서 베냐민 지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후에도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과 베냐민 지파와의 친밀성은 계속 유지되었다(삼상11:1-15; 31:11-13)
분열왕국시대 에브라임족속인 여로보암이 북쪽 10지파 왕이 되었을 때 형제 베냐민 지파를 지키지 못했던 것이 최상의 비극이 되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냐민 지파를 잃은 것이 예루살렘을 잃은 것이다. 여로보암이 북쪽 10지파의 왕이 된 후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왕상12:27-29).
(삼상13장; 사울의 제사 제도 모독(12-14절) : 사울의 경솔한 행동)
사울이 왕이 된지 2년 첫 번째 두 가지 실수를 보도하고 있는 말씀 1-7절 사울의 모험적 군사 행위를 보도하고 있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 군사력을 모아 나름대로 나라의 국방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1,2절), 당시 이스라엘은 여전히 불레셋의 압제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이런저런 불레셋 으로부터 간섭을 받고 있었다(20-21절).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 왕은 자신의 임무가 불레셋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삼상9:15-16)이라고 판단, 자신이 조직한 상비군으로 게바에 있던 불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하고, 이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전쟁을 위해 군사를 소집한 것이다(3절)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의 소집 명령에 응하여 길갈로 모였다(4절), 하지만 자신들에 비해 수와 장비에 있어서 월등했던 불레셋의 군대를 마주 대하다(5절) 모두 숨기에 바빳으며, 그 남은 자들도 두려움에 떨었다(6,7덯).
사울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9:11; 11:11) 신본 주의적이었으나 처음 때와는 달리 인본주의적이며 불순종의 죄를 낳았다, 제사장들만 드릴 수 있도록 규정한 제사 제도를 어기고 사울이 스스로 제사 드린 것(13:9). 이것은 여호와 신앙은 형식으로만 여기고 사실은 자기의 뜻과 판단을 제일로 여기는 인본주의적 비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나온 결과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본적 왕인 사울을 폐하고 대신 새로운 신본적 왕을 예비, 계속 신정 주의적 왕정 통치를 수행토록 하고자 하신 것이다(13:13,14). 사울의 왕권이 폐지되고 신본적 왕인 새 왕 다윗이 예비 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인간 왕이나 어떠한 사역자든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대행자에 불과한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해야 함을 교훈해 준다. 그리고 비록 인간은 실패할지라도 그러한 와중에서 하나님은 전혀 실패함이 없이 당신이 구속사를 진행해 나가심도 일깨워 준다.
한편 본문은 사울을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지 않는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그것은 자기 죄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려 하기 보다는 도리어 변명하며 자기 죄를 합리화 시키려 한다는 것이다(창3:12,13). 즉 사울은 죄에 대한 사무엘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회개는커녕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11,12절). 그러나 그러한 자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창3:23,24).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다윗이 자기 죄에 대한 나단의 지적(삼하12:1-15절)에 눈물로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였기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성군으로 추앙받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음을 본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 죄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려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죄를 겸손히 고백한 다음 용서하심을 바라는 자세를 항상 갖추어야 할 것이다.
본장은 믹마스 전투를 전후로 한 사울의 경솔하고 불신앙적인 형태를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결국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왕이 되기에는 부족한 자임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출중한 신앙 용기로 단독 출전하여 불레셋 진영을 돌파하고 이스라엘 진영의 사기를 올렸다(1-15절). 그러자 전 이스라엘 진영이 요나단의 기습 공격에 혼란을 일으킨 불레셋 진영을 급습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16-23절). 이때 승리를 얻는 데만 급급한 사울이 병사들의 고충은 전혀 고려치 않고 음식을 먹지 말고 계속 전투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저주가 있을 것이라는 비인도주의적이고 경솔한 저주의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마침 이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요나단만이 우연히 이를 어기게 되었다(24-30절). 그 후 전투가 끝난 저녁에 그 역시 비 신앙적인 왕 사울의 영향을 받은 전투 참가자들은 오늘의 승리가 마치 자신들의 힘만으로 얻은 것인 양 자만하여 노략 물로 얻은 짐승을 피 채로 먹음으로 승리를 얻게 해 주신 여호와의 율법을 모독하자 사울은 사후에야 미온적 조치를 하였다(31-35절). 그 후 야간 전투를 계속하려는 사울의 뜻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사태가 발생하여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제비 뽑은 결과 앞서 사울이 왕으로서 내린 저주의 명령을 요나단이 어긴 것이 판명되어 요나단을 죽이려 했을 때 요나단은 죽음을 각오, 기꺼이 죽으려했다(4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단의 신앙을 보시고 승리의 축복을 주신 점을 내세워 백성들이 이를 만류하여 죽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사울만 경솔한 저주를 말한 자로써 판명되게 되었다(36-46절).”
이제 그 세부 내용을 분석해 보면, 먼저 불레셋 과의 대치 상황 중에 요나단이
제13-15장 및 이 후 사울의 행적 전반에 나타난 사울의 모습은 경솔, 탐욕, 질투, 불순종 등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여호와 신앙은 형식으로만 여기고 드리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드림으로써 그의 여호와께 대한 자세의 참 면모를 드러내었고, 사울은 율법에 그 유례가 없는데도 제사장을 마치 자신의 부하처럼 거느리고 다니다가(3절)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묻게 하다가 자기가 보기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가 없이 전세가 유리해지는 것 같이 느낄 때 이것을 자의로 중단시키는 방자한 행동(18-20절) 등이 특히 그의 이런 형식주의적, 인본주의적 비 신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울 왕에 대한 기사에서 우리 성도 각자도 오직 신본 주의적 자세로 살아갈 때만이, “선민의 왕이 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난 사울과 달리”,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구속사의 축복을 상실하지 않고 그 영광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말렉 전쟁 승리와 범죄)
본장은 사울이 아말렉 정복 전쟁 중에 범한 불순종의 죄 및 그 결과로 주어진 2차 사울의 왕위 폐지 예언 등을 보도한다. 그 내용을 세분화 하자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명하신 아말렉 전멸 명령(1-5절), 하나님의 전멸 명령을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거역한 사울의 범죄(6-9절), 하나님의 진노와 두 번째로 주어진 왕위 폐지 예언(10-23절), 진정한 회개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만을 고려한 사울의 사무엘에 대한 동행 협조 요청(24-31), 사무엘의 아말렉 왕 처형과 사울과의 결별(32-35절) 등의 순서로 전개된다.
특별히 당시 백성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이 켰던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에게 자신과 동행함으로써 자신이 계속 하나님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백성들에게 심어 줄 것을 부탁한 사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인본주의적 속성을 새삼 발견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13, 14장에 걸쳐 믹마스 전투와 관련 사울의 불 신앙적 모습과 하나님께 대한 범과를 살펴보았다. 본문은 아말렉과의 전쟁과 관련, 사울이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불순종하는 장면이다. 즉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3절)을 어기고 아각 왕을 사렸을 뿐 아니라 육축 가운데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없는 것만 진멸하였던 것이다(4-9절).
한편 아말렉 족속은 본래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후손 들이었다(창36:12). 그러한 이들이 하나님의 진멸 대상이 된 까닭은 출애굽 당시 그들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우 잔인한 수법으로 괴롭혔기 때문이다(출17:8-16).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것은 단순히 떠돌이 민족에 대한 적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항거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신25:17-19). 그리고 이제 때가 이르자 사울로 하여금 그들을 진멸하도록 자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들에 대해서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지 말고 완전히 진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마땅했다(신12:2,3; 20:1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개인적 명예욕과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나머지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이는 그가 지난 번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기회를 선용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가 이번에 하나님께 절대 헌신과 순종의 모습을 보여드렸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롭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울은 금번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23, 26, 28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써야 하며(신26:16; 롬6:16) 자기 마음을 다스려 헛된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잠16:32; 25:28; 눅21:34)
본장은 사울 재위 제25년인 B.C. 1025년경에, 즉 사울이 아직 건재하여 그 누구도 새 왕이나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생각할 필요조차 없을 때, 당시 베들레헴의 목동에 불가하던 어린 다윗에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1-13절), 그가 하나님이 오묘하신 인도로 비록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사울의 근위 부관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왕실의 법도에 적응하면서 새 왕으로 훈련받게 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14-23절).
더욱이 하나님께선 과거 사울에게 그렇게 하였듯이(삼상10:1) 다윗에게도 신정체제 최후의 지도자 이며 하나님의 대행자인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으심으로 다윗 왕조가 사울 통치하의 신정 주의적 왕정 체제를 계승한 연속성과 일관성을 지녔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결국 택한 백성을 위한 구속사는 전적으로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예정과 이를 이루어 나가시는 섭리 하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세워진 종들을 통하여 진행됨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훗날 이렇게 왕이 된 다윗과 그의 가문에게 소위 다윗 언약을 주셨다(삼하7:4-17). 이것은 결국 다윗 가문의 택한 백성에 대한 영원한 왕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유다 지파 출신인 그의 후손들이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왕권을 보유할 것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 이스라엘인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왕이 되실 것을 가리킨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비록 다윗 이후 그의 왕조에서도 숱한 악한 왕이 태어났지만, 즉 이 다윗 언약으로 인해서 한 번 주신 언약은 결코 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서 그 전날 폐지된 사울 왕조와 달리 다윗 왕조는 폐지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 선민 역사가 내내 분열과 타락만 거듭한 분열왕국 시대 심지어 바벨론 포로 및 중간시대 곧 변변한 국가조차 못 세운 시대를 지나서도 이런 다윗 언약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강림하심으로써 우리는 다윗 이후 시대에도 내내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스라엘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계속적으로 진행됨을 믿기 때문이다.
본장은 먼저 불레셋 침입군의 장수인 거인 골리앗의 모욕적 도전과 이에 겁먹은 인본주의 사울과 그의 병사들의 초라한 모습이 대조된다(1-11절). 이때 아비의 심부름으로 전장(戰場)에 참여한 형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전달해 주고자 왔던 다윗이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과 이스라엘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서 다윗은 비상한 관심을 보일 때, 형들의 적반 하장식의(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에 쓰는 말)제제에도 불구하고 출전 의사를 표시(12-30절). 그 후 이스라엘 모든 장병들이 겁을 먹고 골리앗과의 대전을 회피하고 있는 마당에 비록 아직 전투 출전의 의무조차 없는 소년에 불과한 다윗이 자진하여 출전 의사를 밝히자 부득불 출전시킨다. 이때 출전하면서 밝힌 다윗의 각오에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순결한 믿음의 확신과 용기가 부각된다. 또한 이런 용기가 없어서 장년들은 자신은 숨으면서 어린 다윗을 출전시키는 사울과 그의 병사들의 비굴한 모습이 강하게 대조된다. 그리고 갑옷은커녕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평소 사용하는 목동들의 호신용 무기인 물매만을 가지고 출전하는 신본주의 다윗의 모습을 묘사, 그야말로 다윗은 오직 신앙 하나만으로 출전하였음이 강조된다(31-40절). 그 후 비록 겉모습으로는 다윗이 골리앗에 비할 수 없이 초라하나 그 이면으로는 다윗은 신앙의 용기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음이 골리앗과 다윗이 단독 대전하기 전에 서로 언쟁하는 내용을 통하여 보여 진다(41-47절). 연이어 인간의 무기가 아니라 신앙으로 무장한 다윗이 모든 인간의 예상을 뒤엎고 물매돌 하나로 골리앗을 이김으로 전세가 급변하여 이스라엘이 불레셋을 격파하는 통쾌한 승리의 장면이 기록(48-54절). 끝으로 놀라운 전공을 세운 다윗을 사울이 접견하여 대화한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55-58절). 여기서 우리 성도들은 인보주의 사울의 모습과 신본주의 다윗의 모습 속에서 서로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18-20장까지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나아가 살해하려는 음모를 수차 자행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다윗은 사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결코 스스로의 생각이나 힘으로만 대항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음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사울의 다윗에 대한 핍박과 이에 대한 다윗의 대응은 영적으로는 사단과 세상의, 그리스도와 성도에 대한 핍박과 이에 대한 성도의 자세라는 전 구속사적 현상을 극명하게 축약하여 상징하고 있다 하겠다. 사단이 그리스도를, 세상이 성도를,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대항하여 일어날 지라도 결국 여자의 후손에 의해 머리가 부셔짐을 당할 것이다.
제18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 언약 체결 및 이제 군사적 공로를 세운 다윗이 왕 사울의 관료로써 공무를 수행할 때에도 매사에 충실하여 일반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음이 보도된다. 이는 결국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게 된 배경의 설명이기도 하다(1-5절). 다음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개선할 때의 백성들의 찬양이 사울의 시기를 결정적으로 촉발시켰음이 보도된다(6-9절). 그리고 급기야 사울이 직접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하게 되는 장면이 보도된다(10,11절). 그 후 사울이 정치적으로 더욱 신망을 얻어가는 다윗을 직접 제거하면 큰 잡음이 생겨 후환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유화 정책으로 다윗을 천부장으로 기용하는 대신 자기 딸과의 결혼을 미끼로 죽이고자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사울이 죽이고자 무리하게 요구한 불레셋 병사의 양피를 두 배로 확보하여 사울의 사위도 되고 더욱더 백성의 신망을 얻게 되었음이 보도된다(12-30절).
본장에서 하나님의 택한 받은 자의 모습과 버림 받은 자의 모습이 보이는 극명한 재조를 발견하게 된다. 잠시의 이 세상 정치적 영달을 위하여 다윗을 죽이려 하는 사울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모습은 말씀으로 거듭나지 못한 세상 죄인들을 상징한다 하겠다. 반면 부당한 핍박을 알게 모르게 당하나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영광을 얻어가는 다윗은 그리스도와 그 분의 택한 성도들의 전형적인 상징이라 하겠다.
제19장의 내용 살펴보면 먼저 1-7절이 요나단의 간곡한 충언으로 사울이 일시 마음을 돌려 다윗 살해 의사를 맹세로써 포기한 사실을 밝힌다, 그러나 곧이어 사울은 자신의 명세를 어기고 부하들에게 부당한 다윗 처형 명령을 내렸으나 다윗이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간신히 피신하게 되었음이 보도된다(8-17절). 그 후 사울이 직. 간접으로 당시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무엘에게 피신하여 있는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신의 강권적 개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음이 보도된다(18-24절).
제20장의 내용 살펴보면 먼저 서로 사랑하는 친우 사이인, 다윗과 요나단이 만나서 위기를 타결하기 위하여 사울의 다윗 살해 의사를 최종 확인할 방도를 강구한다(1-11절). 그리고 다윗과 요나단은 향후 비상한 사태가 발발할 것을 염려하여 순수한 친우로서 상호 보호 언약을 체결한다(12-17절). 그리고 사울의 의사를 최후 확인하여 이를 다윗에게 연락할 방법을 재삼 계획한다(18-23절). 그리하여 계획대로 사울의 의지를 확인한 결과 다윗에 대한 살해 의지가 분명해 진다(24-34절). 그리하여 앞서 약속한 방법으로 요나단이 다윗에게 사울의 살해 의지를 알리고 난 후 두 사람은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되고 다윗은 급기야 10년간이나 계속된 도피 생활에 돌입하게 된다(35-42절)
사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사람의 생각대로라면 장차 왕권을 물려받을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 사울의 편에 서지 않고 다윗의 편에 섰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히 사울의 다윗에 대한 처사가 불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 단순히 생각할 것이 아니다 이해 타산대로 한다면 요나단도 아비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단 역시 신앙의 인물이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새 시대의 기둥이 될 다윗을 돕는 공을 세우게 되었고 그 영광도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성도들은 사울과 다윗 사이에 진행되어 지고 있는 상황 가운데 인본주의 사울의 생각이 얼마나 화근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를 그리고 신본주의 다윗과 요나단의 생각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21-31장까지는 앞서 제19장에서 발단된 다윗의 도피 생활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기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B.C.1020-1010년까지 대략 10년간 계속된 다윗의 도피 생활은 대략 3기로 구분된다. 기브아 다윗의 자택에서 헤렛 수풀까지(B.C.1020-1018, 19:9-22:23)의 1차 도피기는 비교적 도피에만 급급했던 시기이다. 한편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까지 (B.C.1017-1015, 23:1-26:25)의 2차 도피기는 주지하는 대로 다윗이 자신의 추적자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 주고 나아가 도피 생활 중에서나마 충직한 추종 세력들의 도움으로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는 몇몇 중요한 사건도 담당했던 시기이다. 한편 불레셋 땅 가드에서 헤브론까지(B.C.1015-1010, 27:1-삼하2:1)의 3차 도피기는 절대적 위기에 몰린 다윗이 할 수 없이 불레셋 땅으로 망명했던 시기이다.
다윗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 사울의 왕궁에서(왕실에 관한 것을 배움) 3년(삼상16:14-23)을 천부장(야전 군 사령관으로 군사의 병법을 배움)으로 2년(삼상18:10-14)을 보내고 도피생활 10년 동안 사울의 추적을 통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다.
사울의 온갖 핍박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신앙의 슬기로 이겨내고 마침내 왕이 된 다윗의 모습은 구속사적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가 마침내 세상을 이기고영원한 천국 구원의 기쁨을 누릴 것의 예표라 하겠다.